MANSION9

  • YOO BONGSANG

    b.1960

    효율성과 가성비의 시대다. 당장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일체의 행위는 무용(無用)함이다. 쓸모없음은 무가치하며, 무가치한 것은 말살되어야 마땅한 야만의 시간을 우리는 힘겹게 건너가고 있다. 역사의 흐름 속에 필연적으로 맞이한 반동의 시대, 발밑의 상식이 흔들리고 사방에서 무도함이 정의를 공격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대한 걸음으로 나아가려는 우리에게 힘과 위로를 주는 것은 단연코 예술이다. 적어도 필자는 그렇게 믿는다.
    무릇 예술이라 함은 ‘쓸모없음’으로 ‘쓸모있음’을 증명하는 작업이며, 이 모순형용의 작업을 ‘굳이’ 해내는 이들이 예술가이며, 일반대중이 예술가를 존경까지는 아니라도 존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7mm의 그늘이 창조한 빛의 세계

    ‘못으로 몽환적인 풍경을 그려내는 작가’로 알려진 유봉상 작가, 그야말로 모순형용의 작업을 일관되게 추구한 작가가 아닐까 싶다. 그의 작품을 굳이 장르로 구분한다면 ‘부조적 회화’라고 할까?
    유봉상 작가의 작업은 근사한 데님 앞치마에 물감을 묻히며 부드러운 붓으로 캔버스를 적시는 작업과는 사뭇 다르다. 사람의 팔로는 들 수 없는 무게의 판넬을 기계를 이용해 작업대에 세우고 그 위에 에어태커를 이용해 15mm 헤드리스 핀못을 반만 박아넣어 7mm 길이를 남긴다. 작업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못’이라는 폭압적인 재료를 활용해, 에어태커를 이용한 폭력적인 작업, 그리고 탄생하는 작품은 ‘못’이라는 실재하는 것으로 만들어낸 7mm의 그늘이 만들어낸 빛의 세계다.

    깊고 어두운 숲, 그리고 환한 빛

    유봉상 작가의 작품은 깊고 어두운 숲을 조망한다. 그런데 작가의 숲은 깊은 어둠 속에서 환한 빛을 뿜어낸다. 보는 이를 압도하는 ‘환함’이 아니다. 부드럽고 은밀하지만 내면의 힘을 가진 ‘환함’이랄까? 작품 속 숲은 분명 생명체의 압도적 밀도를 가진 열대우림, 깊고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장소의 상징이나, 작품 속 환한 빛을 따라 나도 저곳으로 가고 싶다는 은근한 욕망을 부추긴다.
    그래서일까? 유봉상 작가가 창조한 빛의 장면은 누구나, 언젠가, 분명히, 꿈속에서 봤을 법한 장면이다. 그의 작품을 보면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것이 피어오르며, 행복했던 꿈결에서 본 것 같은 느낌이다. 약 30만개의 핀못으로 형성된 7mm의 빽빽한 그늘, 그것이 만들어낸 빛은 보는 이의 시선과 기분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보인다. 가까이에서 또는 좀 더 거리를 두고 보는 것, 옆에서 또는 정면에서 보는 것 등 그때그때 다른 느낌이다.
    조선시대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도원(桃源)을 화가 안견(安堅)에게 구술하여 그리게 했다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보는 것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현실에 기반한 성실한 노동의 작품, 그래서 작가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유봉상 작가의 작품은 전부 현실에 존재하는 곳이라는 것! 필자는 여기에 유봉상 작가의 힘이 있다고 본다. 실재하는 현실이 작가의 고된 노동으로 작품으로 창조된다는 것 말이다.
    사실 필자는 예술과 미술에 대한 문외한(門外漢)이다. ‘아직’ 문 안에 들지 못하고 문 바깥에 있기 때문에 끝없이 ‘문 안의 세계’를 동경하고 탐닉한다. 당연히 ‘문 안’에 대한 오해가 필연적인데, ‘예술가는 아마도 이러이러할 것이다’라는 필자만의 편견 같은 것들 말이다. 유봉상 작가와 작품을 만나고 필자의 오해는 ‘오해’를 넘어 ‘몰이해’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유봉상 작가 작품의 시작은 모든 창작의 과정이 그러하듯 ‘리서치’부터 시작된다. 인터넷을 통해 호수나 강에서 배를 타고 물 위에서 바라볼 수 있는 숲을 고른다. ‘고른다’라는 고작 한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섭섭할 정도로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어둠과 밝음이 조화를 이룬, 톤의 다양함을 담은 숲, 작품으로 제작해 걸었을 때의 느낌 등을 고려하며 숲을 찾는다. 어둠이 깊어야 빛이 환하듯, 어둠이 깊은 숲으로는 열대우림의 식생을 가진 숲이 적합하다.
    그리고 현실의 숲으로 간다. ‘간다’에는 역시 많은 것들이 숨어 있다. 당연하게도 해외 유명관광지가 아니니 숙소나 교통편이 여의치 않다. 호수와 강에 작은 쪽배를 띄워놓고 숲을 촬영한다. 그 모든 과정은 막막함과 귀찮음과 고단함의 연속일 터이다.
    촬영한 사진 중 어떤 사진을 골라 어떻게 화면을 프레이밍(framing)할 것인가?의 단계부터 오롯이 작가의 고민이 시작되며, 여기서 작품의 성공여부가 50% 정도는 결정된다. 그리고 수십만 개의 못을 박는 성실하지만 고단한 노동의 시간을 감내해야 한다.
    예술가들은 일상의 많은 시간을 ‘뮤즈’를 찾는 창조적 시간으로 보낼 거라는 일반인의 생각은 착각일 뿐이다. 어떤 직종의 직장인보다 더욱더 근면 성실하게, 해가 떠 있을 때 작업하고 해가 지면 쉰다. 출근과 퇴근의 루틴을 지키며 지루한 작업을 묵묵하게 감내한다.
    단, 일반의 직장인과 완전히 다른 점은 있다. 보통의 직업인은-업종마다 조금 다르기는 하겠지만-노동시간과 노동에 대한 보상이 대체로 정비례 한다. 그러나 유봉상 작가의 고단하고 지루한 노동시간과 그에 대한 보상이 반드시 비례관계에 있지 않다. 오랜 시간의 ‘노동’이 빛나는 성과가 될 수도, 또는 무용의 것이 될 수도 있음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예술가의 재능을 받은 대신 짊어져야 하는 천형(天刑)이 아닐는지.

    “예술가에게 필요한 것이 과연 재능만일까요? 가장 필요한 덕목은 버티는 힘입니다. 뭔가가 나올 때까지 버티는 힘, 시장에서 인정받을 때까지 버티는 힘이 가장 중요합니다.”

    근면 성실, 고단하고 치열한 노동, 그리고 끝까지 버텨냄으로써 우리에게 선사하는 작품의 힘,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작가를 존중해야 마땅하고, 그래서 작가는 반드시 필요하다.

    작가는 진보적일 수 밖에 없다

    유봉상 작가 그가 창조하는 희망인 듯, 절망인 듯 아련한 몽환적 공간의 세계는 절대로 보는 이에게 무엇인가를 강요하지 않는다. 작품 속에서 무엇을 만나게 되든 그것은 보는 이의 몫으로 돌려놓는 작가의 관조(觀照)가 조금 쓸쓸하기까지 하다. 치열한 노동의 과정으로 탄생한 작품을 통해 무언가를 주장할 법도 한데, 작가는 말이 없다. 그저 묵묵히 새로운 시도를 할 뿐이다.
    작가에게 버텨내는 힘은 어디에서 올까? 그것은 새로운 시도에 있다.
    지금 하는 작업 속에 무언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과연 내가 하는 방향은 맞나? 하는 예술적 고뇌와 생활인으로서의 끝없는 불안함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새로운 시도다. 아니,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어도 좋다.
    끊임없는 시도만이 작가를 작가이게 해준다는 것을 유봉상 작가는 오늘도, 내일도 증명하고 있다. 정직한 노동자가 가졌을 법한 손으로, 과감하게 그리고 섬세하게 빛의 세계를 창조해가는 그는 ‘영원한 현역’ 또는 ‘당분간 또는 꽤 오랫동안 현역’일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진보적일 수밖에 없다. 아니 사실은 진보적이어야 한다. 정치적 수사의 보수와 진보 프레임이 아니더라도, 보수적인 작가는 있을 수 없다. 왜? 끝없이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하는 것만이 작가를 작가로 존재하게 하는데, ‘보수적인 작가’는 말이지만 말이 되지 않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일 뿐이다.
    “못으로 걸 수 있는 게 여러 가지가 있지만, 유봉상 작가는 빛을 걸어놨다”라고 한 어느 외국 평론가의 말처럼, 유봉상 작가 그가 차가운 철제 못에 걸어놓은 빛의 세계는 비록 불안하지만 담대하고 싶은 우리의 걸음발을 비춰준다. 깊은 그림자 속에서도 의연하게 빛나는 그의 빛의 세계는 때로는 위로가, 때로는 용기가, 때로는 눈물이 된다.

    그는 이번에 또 어떤 운명으로, 어떤 고민으로 새로운 작품을 걸어놨을지 기대에 들뜬다. 그가 만들어낸 작품 속에 또 어떤 빛이 걸려 있을지 말이다. 불안한 시대, 우리를 안심하게 하는 것은 효율과 성과의 세계가 아니라 아름다운 무용한 것들의 세계일 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유봉상 작가가 만들어낸 빛의 숲 같은 곳 말이다

    우리의 담대한 걸음걸음을 비추는 유봉상의 빛, 서여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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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B20240822 , Headless pin, Acrylic on wood , 150 x 100 x cm ,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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