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1959
권순익은 그동안 점, 색 등 조형요소의 기본을 탐구하는 작업을 진행하여 왔다.
점 시리즈에서는 물감과 흑연을 계속 덧바르고 갈아내는 방식으로 하여 질감이 독특한 화면을 이룩하였고 평면회화일지라도
입체적인 효과를 만들어냈다. 다양한 색감처리, 화면 속 공간 레이어의 설정과 중첩, 비산하는 듯한 검은 흑연 점들이 특징적인데
‘무아(無我)- 신기루’로 명명된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무념무상의 상태로 감정과 내면의 수양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색점을 일일이
찍어가면서 이후에 흑연을 다시 점점이 덧붙이는 방식은 평면성과 입체성이 혼재된 가운데 다른 색의 정사각형과 마름모, 삼각형,
원형 등의 면을 겹치면서 공간감이 부여된다. 점의 무한한 확장성과 서로 다른 색면의 조화는 공간에 깊이감과 진동을 부여하면서
화면 밖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게 되었다. 이렇듯 처음에는 점에 대한 진지한 탐구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점차 작가는 더욱더
기본적인 조형요소를 탐구하려는 의지가 생김에 따라 면 시리즈를 본격적으로 제작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점과 면 시리즈는 붓질을 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면 시리즈는 좀 더 진일보한 개념을 보여주고 있다. 면이 강조되므로
색이 매우 중요한데 점 시리즈에서는 다양한 색을 사용하였다면 면 시리즈에서는 정돈된 분위기이다. 전체적으로 각각 다른 색으로
다층적인 바탕색을 구축하는데 이러한 견고하고 구축적인 바탕의 켜는 가장자리에서 미세한 흔적을 남기므로 시간과 물질이 응축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바탕색을 처리한 후 붓질을 일정한 간격으로 그리는데 이러한 잔붓질의 속도는 매우 일정하여 화면 속에서
작가가 감정을 극도로 조절하면서 작업에 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세하면서 가지런한 붓질은 작가가 일종의 수행정진하는
태도로서 작업을 진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캔버스의 형태는 다양하게 보이나 작가의 수행성이 중요하므로 작가의 신체적 가동범위가 반영되었다. 구상 초기 단계에서 색,
공간, 구성 등 전체적으로 조화로운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일단 6호사이즈에서부터 시작하였으나 점차 캔버스를 다양한 사이즈로
변용하였다. 무엇보다도 바탕재 위에 다른 색의 붓질을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가해야 하므로 작가의 신체적 한계치만큼이나 아크릴
재료의 속성을 이해하고 순응하며 특히 건조 속도를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재료의 물성을 완벽하게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이 작업의
특징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형식은 작가는 90년대 10여년 넘게 도자기를 제작한 경험에서 비롯되었는데 도자기의 성형과
유약처리,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분청사기의 다양한 성형방식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여러 차례 덧바른 붓질이 마치 두터운
물감층의 표면을 긁어낸 요철효과를 보여주는데 이는 도자기 문양 기법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작가의 작품이 매우 현대적인
추상회화 작품으로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작가가 오랫동안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뿌리깊은 관심과 함께 현대적 변용을 모색한
결과이기도 하다.
화면의 서로 다른 면 사이에 흑연으로 처리된 틈새가 자리잡고 있다. 마치 색이 벌어진 틈 사이로 튀어나온 검은색 돌처럼 보이기도
하고 여러 색면 가운데 화룡정점처럼 보여지는 흑연은 작가가 처음부터 많이 썼던 재료이다. 흑연은 검은색으로서 모든 색을 담고
있기도 하면서 동시에 과거로부터 비롯된 재료이다. 작가는 이러한 흑연을 통해서 과거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오늘날 빛나는 존재로서
인식하면서 작가를 가장 대표하는 재료로 삼고 있다. 흑연 자체의 물성도 그냥 보기에는 거칠게 보일 수 있으나 반복하여 칠하여 갈게
되면 빛이 나므로 이러한 특성은 작가의 관조적이면서 수행적 태도를 잘 드러내고 있다.
작가가 틈에 주목한 계기는 언젠가 아프리카 여행을 가게 되었을 때 우연하게 발생한 사건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작가는 라즈니쉬의
‘틈’책을 가지고 갔는데 당시 카메라를 분실하게 되면서 그 책에 여행 스케치를 남기게 되었다. 여행의 감흥을 책에 연필로 그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은 작가로 하여금 ‘지금 이 순간, 현재를 충분히 인지하고 즐기자’는 태도를 취하게 하였다. 마치 눈 앞에 기회를 놓치지
말고 오늘에 충실하자는 ‘carpe diem’ 이라는 표현처럼 없어진 것, 사라질 것에 대하여 후회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면 시리즈에서의 주요 특징은 적(積), 연(硏)이라는 제목처럼 물감을 덧발라서 색을 내는 방식과 반대로 흑연은
문질러서 닦아야 빛이 나는 서로 다른 방법을 취하고 있다. 작가는 화면 구성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구조의 조화를 모색하는데 화면은
흑연의 틈을 사이로 두고서 상하 혹은 좌우로 구분되어 있으며 정반합의 구조를 지닌다. 작가는 이러한 화면 구조가 음과 양, 시간과
공간, 과거와 미래라는 개념을 통합하여 현재의 나로 잇고 있다고 말한다.
한편 작가는 평면 작업 이외에 최근 기와 설치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2018년 영은미술관에서 개최된 ‘적,연’ 전시부터 소개되기
시작한 기와 시리즈는 검은 기와가 공간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서 켜켜이 수직, 수평으로 쌓여있는 공간 설치작업이다. 작가는
흑연을 기와 위에 문지르면서 기와가 지닌 원래의 형태, 질감과 빛을 더 강조하면서 그 존재감을 공간 전체로까지 확장하였다.
작업초기에는 실제기와를 사용하였으나 점차 물질감보다는 표면의 질감과 빛의 중요성을 인식하게되면서 무게를 가볍게 처리한
기와형태의 조형물을 제작하여 그 위에 흑연을 덧바르고 가는 방식을 통하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새로운 작업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 속에서 작가는 이후 작업으로 선에 대한 작업을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점과 면 시리즈 모두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색과 빛의 조화, 물성에 대한 존중, 작가의 수행적 태도가 기반이 되어있음을 감안한다면 그의 선 시리즈 역시
그의 연장선상으로 짐작된다. 빛을 다루고 있으나 얄팍하지않은 견고한 물성을 지닌 화면은 미묘한 파장을 일으키면서 공간 속에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듯이 그의 선 시리즈 역시 새로운 전환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한다.
권순익 2024 개인전 평론, 류지연 | 국립현대미술관 미술품수장센터운영과장
Interstice-(Pileup&Rub)2-01 , Mixed media on canvas , 90.9 x 72.7 x cm , 2024
층층이 쌓아 올린 독창적인 물성, 현재의 순간에 집중한 무아(無我)의 정신을 비추다
층층이 쌓아 올린 독창적인 물성, 현재의 순간에 집중한 무아(無我)의 정신을 비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