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1991
예술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영감을 주는 대상을 집중해서 관찰하며 어떠한 부분에서 내적 동요를 주는지 파악하고 해석하는 것이 우선된다. 나의 경우에 내면에 가장 큰 울림을 주는 소재는 꽃이다.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생명력의 가장 화려한 결과물이며, 그 결과를 만들기 위해 소리 없는 발버둥으로 이루어진 한겹 한겹의 꽃잎들이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치열한 삶을 아우르는 소재라고 까지 느껴진다.
<제석천도(帝釋天圖)>
종교적 의미를 가진 회화의 목적은 다양하다. 역사적 배경에 따라 이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그리기도 하고, 기록을 하기 위함이기도, 여러 건축물이나 공간에 쓰이는 장식적인 목적이기도 하다. 또는 이를 그리는 모든 과정이 신에게 닿기 위한 수행의 과정이라고 여겨, 바탕재를 염색하고 선 하나 긋고 안료 한번 칠하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한다. 그렇게 하나씩 그려내면서 신의 모습을 완성해 가기까지의 이 모든 과정이, 자신 안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는 번뇌에서 벗어나 신에게 닿기 위한 수련의 의미로도 그림을 그린다.
몇 년간 전통회화와 보존에 대해 배우면서 여러 문화재를 직접 마주하고, 옛 선조들이 어떻게 그려냈는지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나의 많은 것들이 변화했다. 한국의 전통 불화에는 끈기가 있었고 열정이 있었으며, 고요하면서도 타오르는 불과 같이 맹렬했다. 이 연구들은 나에게 작가라는 꿈을 다시금 안겨준 하나의 작은 씨앗이 되었다. 그렇게 5년을 작가라는 삶을 살고, 나의 그림을 그리다가 이번에 다시 마주한 옛 가르침 앞에서 내면에 있는 답을 다시 찾고 싶었다.
나는 그 고려시대 제석천도를 그렸던 불자처럼 다시 모든 과정을 수행의 마음가짐으로 임했다. 산에서 오리목 열매를 주워 와서 비단에 염색하고, 풀을 직접 쑤고, 벼루에 먹을 갈아 선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긋고 채색했다. 제석천의 몸에서 나는 신광(身光)은 나의 작업에서 모티브를 따와 장미의 단면으로 표현하며 몸 뒤에서 화사하게 피어나고 있다. 금선 하나하나, 염료의 퍼지는 농도까지 온전하게 작품에 스며들고, 완성되었을 때 이 모든 과정들이 그림에서 자연스럽게 발현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렸다.
내가 이 그림을 완성하면서 답을 찾았는지 찾지 못했는지, 신에 닿았는지 명확하게 말하지 않아도 나의 일렁이는 번뇌를 벗어나기 위한 치열한 노력이 담겼음을 자세히 보여준다면 그에 대한 답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ooo에게는 <수선화에게> 라는 정호승 시인의 시에서 시작된 작업이다.
많은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이루고 싶었던 일을 해내는 성공을 얻기도 하고, 행복의 최대치인 순간이라고 느끼는 전성기의 시간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런 희열의 순간을 맞이한 후에 정상에서 내려오는 일은 필연적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자신이 이룬 성과나 행복의 순간이 서서히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무력감에 휩싸일 수 있고 홀로 남겨졌다는 생각에 외로움을 느낄 수도 있다.
시의 구절처럼 사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니까. 그럼에도 잘 견뎌낸다면 새로운 희망의 싹은 언제든 틔워질 것이며 만개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시든 꽃과 밝은 꽃봉오리의 대치된 이미지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외로움에, 고통에 잠식당하지 않고 다시 피어날 희망을 생각하며 위안을 얻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제석천도 2024 , 비단에 천연안료 , 78.4 x 105 cm ,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