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SION9

  • KWAK HOON

    b.1941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곽훈은 미술의 실험을 그치지 않는 치열한 의식의 소유자이다. 또한 그는 비단 회화뿐만 아니라 도예와 설치, 퍼포먼스 등 가히 전방위적 활동을 벌이는 열정적인 예술가이기도 하다. 한 때시인이 되길 꿈 꾼 적이 있는 그는 수 백 편에 이르는, 기성시인 못지않은수준 높은 시들을 남겼다.
    곽훈은 단순히 영감과 직관에 의존하여 그림을 그리는 막연한 의식의 소유
    자가 아니라, 대학시절 약대에서 화학 수업을 들을 정도로 색채에 대한 과학
    적인 사고의 훈련을 한 바 있으며, 굳건한 지식의 토대 위에서 색채를 다루
    는 습성이 몸에 배어있는 작가이다. 이는 가령 그가 자주 사용하는 베네치안
    레드(Venetian Red)가 금색이 아니라 구리색을 띤 것이며, 한국 사찰의 대
    웅전을 생각하며 이 색을 주조(主調)로 그림을 그린 사실에서 잘 나타나 있
    다. 그는 색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그의 그림에 대해
    신뢰성을 높이는 요인이 된다. 물감의 화학적 성분과 색의 유래에 대해 모르
    고 그린 그림과 알고 그린 그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특히 요즘처럼 혼
    합재료(mixed media)의 사용이 회화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재료
    학에 대한 연구는 작가가 재료를 선택하는 데 따르는 매우 중요한 선행 조
    건이 아닐 수 없다. 곽훈은 그런 점에서 볼 때 선구적인 경우에 해당하며,
    이는 그의 작품에 대한 분명한 보증인 것이다. 그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색
    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곤 하는데, 그런 재료학 내지는 색채학적
    배경이 있었기에 그처럼 뛰어난 작품을 낳을 수 있었으리라고 미루어 생각
    하게 된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곽훈에 대한 평가는 전위운동과 깊이 관련돼 있다.
    1969년, 곽훈은 김구림, 김차섭 등과 함께 ‘A.G(Avant-garde)’라는 단체를
    결성, 창립 멤버로 활동하면서 전위미술 운동의 기치를 내걸었다. ‘A.G'그룹
    은 당대의 엘리트 미술인들로 구성된 전위미술 단체로서 1975년 해체될 때
    까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 후 그는 미국으로 떠
    나게 되어 지속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전위의식은 그의 작가적 생애를
    관통하는 바탕이 되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관심과 열정은
    2011년, 70세를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가로 6미터, 세로 5미터에 이르는
    대형 천에 거대한 붓을 장착한 포크레인을 운전하여 행한 드로잉 퍼포먼스
    에서 잘 나타났다 . 이처럼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은 1995년의 베니스비엔날
    레 출품작에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음악적 요소가 강한 제의(祭儀) 퍼포
    먼스를 비롯하여, 2012년 대구미술관 회고전에서 발표한 거대한 크기의 흰
    색 천으로 만든 입방체 구조물에 잘 녹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곽훈의 예술적 본령은 역시 회화에 있다. 1975년 미국
    으로의 이주는 원거리에서 조국인 한국의 문화유산을 되새김하는 계기가 되
    었다. 그때부터 그는 먼 타향에서 조국의 문화유산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한국의 사찰 건축을 비롯하여 고분, 다완, 실패, 옹기, 한적(漢籍) 등등에 대
    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작품의 소재로 이어졌다. 곽훈은 형식으로는 추상 화
    풍을 취했지만, 내용은 지극히 한국적인 것을 다루었다. 그것은 일제강점의
    말기와 6.25동란의 혹독한 전쟁 체험을 유년기의 추억으로 간직한 그가 자
    신의 감정을 캔버스에 투사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캔버스에 물감을 뿌리고,
    칠하고, 긁고, 입히고, 닦아내는, 그 특유의 표현 방법론이 등장하게 된 것도
    이러한 체험과 관련이 깊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고대 이집트의 경전의 일종인 팔림세스트
    (Palimpsest)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파피루스로 만든 것으로 누대
    (累代)에 걸쳐 쓰고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쓴 탓에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고색창연한 느낌을 발한다. 곽훈은 이 경전에서 받은 감흥을 그 특유의 긋
    고, 지우고, 그 위에 다시 그리는 반복적인 행위에서 비롯된 특유의 표현과
    그 결과로서의 상징을 통해 역사 속에 내재한 문화형식에 대해 숙고하는 계
    기를 만들어 주었다.
    피 앤 씨 갤러리의 두 전시장에서 동시에 열린 이번 초대전을 통해 곽훈은
    땅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지로부터>라는 타이틀이 말해 주듯이
    그가 이야기하고자 한 대지, 즉 땅은 어떤 구체적이며 특정한 장소를 가리키
    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대지는 가령 한국이라는 특
    정한 지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론적이며 보편적인 거소(居
    所)로서의 대지를 일컬음일 것이다. 이는 그가 언어의 결에 민감한 시인이라
    는 사실과 구상으로서의 회화가 아니라 추상으로서의 회화를 다루는 화가라
    는 사실과 직결된 문제이다. 물론 그의 작품들 중에는 다완을 소재로 그린
    것들이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이 경우에 있어서도 그것은 단지 묘사 자
    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흙의 원형(原形)으로서의 대지적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곽훈이 자신의 작업에서 제의적 요소를 강조하는 것과 다양한 문화적 형식
    을 연결시키는 작업의 이면에는 인간의 존재론적 거소로서의 대지에 대한
    깊은 명상이 자리 잡고 있다.
    한국에서 제일 오래된 국수공장 창고를 개조한 전시장의 한 벽은 수백 개
    에 이르는 다완을 정사각형의 모듈 형식에 배치한 전면적(all-over)인 초대
    형 작품이 설치되었다. 전시장의 중심에는 작가가 알래스카에서 우연히 습득
    한 거대한 고래의 갈비뼈가 놓여있다. 고래의 갈비뼈 하나를 전시장 바닥에
    설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 자체로 ‘발견된 사물(found objet)’로서
    의 작품에 속하는 것일까?
    뼈를 중심으로 그 반대편에는 그가 베니스비엔날레에 출품한 것과 같은 모
    양의 옹기작품이 설치돼 있다. 여러 개를 이어 붙이면 마치 퉁소처럼 보이
    는, 위로 커다란 구멍이 솟아있는 옹기들이 여러 개의 긴 장대들로 이루어진
    버팀목에 매달려 있다. 바람이 옹기의 공명통을 지나가면 어떤 신비스런 음
    악 소리라도 들릴 듯한 이 작품은 마치 초혼(招魂)의 의식을 위한 설비처럼
    보인다. 그것은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낡고 퇴색한 고래 갈비뼈가 지닌
    오랜 역사를 상기시키는 듯 하다. 소리와 언어는 원초적이고 자연적이며, 동
    시에 문화적이란 점에서 서로 닮았다. 자연의 소리와 인간의 언어가 자아내
    는 이 기묘한 가역적 풍경은 일찍이 시인으로서 조탁(彫琢)된 곽훈의 언어적
    감각과 감수성의 소치일 것임에 분명해 보인다. 시인으로서의 언어적 감각과
    화가로서의 색채적 감수성은 이 작품들에 이르러 혼효(混淆)되고 있으며, 그
    것은 동시대 문화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자 미래적 비전인 것이다. 그것은 가
    령 과도한 물질문명의 심각한 폐해와 상업자본에 의해 황폐화된 현단계 인
    류의 정신적 위기에 대한 경고 내지는 조심스런 진단일지도 모른다.
    곽훈의 그림에는 핏빛과도 같은 붉은 색, 그가 인류 최초의 색이 아닐까 라
    고 생각하는 산화철(번트 시엔나)이 자주 등장한다. 아주 먼 옛날, 태고적 인
    류가 숯과 흙, 그리고 다양한 광물질 안료를 동물성 기름에 개서 동굴 벽에
    그림을 그렸을 때의 원초성이 살아 숨쉰다. 그가 자신의 작업에 제의적 요소
    를 도입하는 것과 이 물질적 원초성과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가스통 바슐
    라르가 물질적 상상력을 주장했듯이, 물, 불, 공기, 흙과 같은 원소들은 현대
    문명에 피폐해진 인류에게 근원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한다. 따라서 영감에
    가득찬 시인의 감수성과 직관을 가지고, 또한 물질과 질료를 다루는 화가로
    서 곽훈이 바라보는 세계는 치유 불가능한 세계가 아니라, 근원으로의 회귀
    를 통해서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꿈꿀 수 있는 그런 세계일
    것이다. 대지에 대한 하나의 유비로서 곽훈의 회화와 설치작업은 그런 관점
    에서 봤을 때 우리에게 꿈꿀 , 수 있는 권리를 상기시켜 준다. 모더니티가 긴
    역사의 도정을 통해 살해한 신화, 샤머니즘, 설화에 대한 그의 도저한 관심
    은 그의 기나 긴 작업을 통해 복권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읽
    어내는 일은 오로지 관객의 몫이다.

    근원으로의 회귀, 윤진섭(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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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allaayt , Acrylic on paper , 56.5 x 76 x cm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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